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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이로부터카테고리 없음 2020. 1. 22. 23:51
어서오세요 환상관리부서에
가장 아름다운 이로부터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바닥에 깔린 물들은 도저히 빗물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인 색이었다. 신발을 신고 있어도 어느새 젖어드는 양말, 온 몸이 물먹은 것 처럼 축 쳐져 기분이 나빴다.
심지어, 우산도 챙기지 않아 급히 편의점에서 싸구려를 하나 샀지만, 우산살이 약해 바람이 불때마다 부러질 것처럼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이럴바엔 버리고 맞는 게 낫겠다.
운이 없을려니까, 이런저런 불평을 중얼거리며 집 근처 가로등을 지나갈때 였다. 가시야에 무언가 이질적인게 보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들 사이로 살짝 떼가 묻은 봉제인형이 보였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투박했지만 그 만큼 눈길을 사로잡았다. 처음 인상은 요즘도 저런 인형이 있네- 정도의 감상이었다.
주워오고 싶다는 생각도 들렀지만, 비오는 날에 버려진 인형을 줍는 건 현명한 짓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봉제인형에는 벌레의 알도 많이 있어 함부로 주어오는 게 아니다.
없었던 일 처럼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일주일, 이주일, 삼주, 쓰레기를 수거하는 날에도 그 인형만큼은 치워지지 않았다.
오늘은 그 인형이 사라졌을까 확인하는 것이 내 하루일과가 될만큼 그것은 내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있었다.
내심 누군가가 그것을 가져가지 않길 바랬다. 허전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도 유일하게 빛을 받아, 빛나는 황슴사과같은 색을 가진 그 봉제인형을 나는 자주 떠올렸다.
"단씨 오늘 야구보러 갈래요? 공짜로 표 생겼는데"
오늘 오후에 시작하는 경기관람권을 들이밀며 정이 제안했다.
"저희 반장님이 가족들이랑 본다고 사셨는데 일터져서 수습하느라 못가게 돼셨거든요. 그래서 두장 받았어요"
정이 하는 말에 오늘따라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어...뭐라고?"
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그냥 야구보러 가자구요, 아 혹시 안좋아하시나"
"아,아냐 그냥 오늘 저녁에 일이 있어서"
정은 살짝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그 봉제인형쪽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나도 언제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르는 데, 더 늦게 가면 누가 인형을 가지고 갈 것만 같았다.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요즘 단씨 정신 좀 놓고 다시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저희 부서가 부서잖아요, 놀 수 있을때 뭔가 하고 싶을때 바로바로 하는게 좋아요
좀 사람 미치게하긴 좋으니까 뭐 쌓이거나 그러면 스트레스 쌓이기 전에 풀어줘야죠
일 없을땐 혼자 침대에 누워있지말고 연락해요"
혼자 침대에 누워서, 그 말은 반쯤 맞았다. 나는 집에 들어와 불을 킬 생각도 안하고 방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창문 너머로 노란 빛이 들어왔다.
순간 정신이 들었다. 그 빛 끝에는 그 인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방에는 나 혼자 밖에 없었다. 혼자 있다는 게 요즘들어 외로웠다. 아니 그 인형이 이곳에 없다는 게 뼈시리게 아쉬웠다. 갖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한번만 더 보고 싶었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시간은 보지 않았지만 밖은 어두웠다.
이 시간에 인형하나를 보자고 다시 나가자고?
그건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그냥 씻고 술이나 까자, 싶어 자리에사 일어났다.
냉장고를 여는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손 끝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 가슴이 서늘해지는 감각.
두려웠다. 나는 이 감각을 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이것은 눈이 내리던 날 내가 잘못된 선택으로 지아를 잃었던 날에 들었던 기분이었으며, 아직 내가 두팔이 성했을 때 괴기 그 자체인 건물의 문고리를 잡았을 때 들었던 기분이었다.
내 본능이 나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각에 발 끝이 저려오는 것 같았다.
나가야하나?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때 창 밖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쓰레기 수거차인가? 사람이 걸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인형을 줍기위해 이곳에 왔을 터였다. 생각해보면 누군가 버려둔 인형이 그렇게나 오래 방치된 건 이상한 일이았다.
누군가 가져가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너무 오래 미뤄뒀다.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 다음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생각보다 몸이 더 먼저 반응 했다. 한걸음에 달려나간 그곳에는 아직 인형이 남아있었다.
'다행이다'
사람이 안심하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실감했다.
투박하게 사람을 흉내낸 형상의 그 봉제인형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Ich freue mich auf dich'
스스 하는 바람소리가 많이 섞인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이 세명의 목소리가 족히 섞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말인지 단순한 소리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인형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는 확실했다, 그것은 나를 안심 시켜주고 있었다.
가지고 싶었다. 줍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말았다. 아직 주우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Hab mich! Hab mich!'
나로서는 따라 할 수조차 없는 그런 소리였다. 애처롭게 나를 부르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안되었다.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 집에가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빨리 집에가고 싶었다. 아니 그 인형을 만나고 싶었다.
K골목만 지나면 코앞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비가 내리고 말았다.
비! 내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인형이 형편없이 젖는다.
이 미세먼지를 머금은 알갱이들이 내 인형을 더럽히게 될 것 이었다.
그건 너무 마음 아픈 일이다.
그렇게 되기전에, 이미 늦긴 하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하였다.
나는 최대한 달렸다. 우산을 꺼내 쓸 겨를도 없었다. 이 비로부터 최대한 그것을 지키고 싶었다.
골목길에 도달했을때 인형은 비를 맞아 축 처진 상태였다. 어딘지 처연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나는 마음 한 구석에러 불처럼 끓어오르는 애절함을 느꼈다.
이 인형은 이런 취급을 받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었다. 최소한 우리 집에 두기로 했다. 좋은 곳은 아니지만 길바닥 보다는 훨씬 시원하고 아늑한 곳이다.
진작 했어야 할 일을 나는 미루고 미루다, 이제서야, 아니 지금이라도 실행하기로 했다.
' Von heute ab sind wir immer zusammen'
또다시 귓가에 어떤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큭큭대는 웃음소리 역시 들린 것만 같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기분이 좋았다.
내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마치 인형의 심장처럼 느껴졌다. 나의 온기가 젖은 인형에 닿아 인형에선 미지근한 물의 온기가 전해져왔다. 작은 생명 하나를 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제 청소해둔 서랍 위에 놓기 위해, 인형을 한번 빨아야했다.
인형에 붙어있는 테크에는 손빨래를 하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회사 로고로 추정되는 것은 황금사과였다. 정말로 사과모양의 로고에 가운데에 고딕체로 gold apple이라고 적혀있었다. 뒷면에는 made in 이 적혀 있었는데 그 뒷부분은 닳아 없어져 어디인지 알 수는 없었다. 뭐, 90%의 확률로 china라고 적혀있었갰지만.
의외로 인형은 오랫동안 밖에 있었돈 것 치곤 인형은 아주 깨끗했다. 구정물이라곤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이럴거였으면 좀 더 빨리 주워올 걸...이라는 후회도 들었다. 지금이라도 가져왔으니 만족해야지.
그 날 부턴 집에 가는 게 아주 즐거워졌다. 나는 항상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며, 모든 걱정도 사소한 고민 조차 더는 생기지 않았다. 근심인형이란 게 바로 이런걸까, 오죽하면 정은 나에게,
"단씨 연애해요?"
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정도로 세상의 모든 새가 나를 향해서만 지저귀는 것 같았고 세상의 모든 가로수가 나를 비추는 것만 같았다. 땅 위는 구름 처럼 포근했으며 정신 한구석이 마비되는 것 같은 즐거움만이 함께했다.
그 인형을 가진 것 만으로도 사람은 이렇게나 행복해 질 수 있었다.
그것이 내 집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이 충만해지는 만족감이 들었으며 집에 가서 그것을 볼 수 있다는 생각 만으로도 모든 좆같은 일은 넘길 수 있었다. 집에 가서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인형을 들여다 보는 것 만으로도 시간은 아쉬울 정도로 속절없이 빨리지나갔다.
내 일과는 인형, 아니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나는 행복했고 이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랬다.
"아름답다"
생전 입에 잘 담본 적도 없는 단어였지만,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개 입밖에 튀어나왔다.
전체적으로 누런 천을 어설프게 사람모양으로 잡고 검은 실로 대충 눈코입과 옷 그리고 사람의 실루엣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뭐랄까 뇌를 관통하는 감격스러움이 그녀를 보고 있을때마다 헤일처럼 밀려왔다.
물론, 그녀는 물건 따위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완벽한 아름다움 이었다.
"단씨, 저녁 같이 안먹을래요? 석하가 쏜댔는데"
"누구?"
"아 기억안나요? 제 앞에 앉아있는 사람 있잖아요"
정말 처음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아냐, 오늘은 그냥 집에 갈래"
흐음, 정은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오늘따라 기분이 찝찝했다.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 그녀가 무사히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요즘 이상한 거 알아요?"
"전에도 그 말 했잖아!"
이 대화가 길어질 까봐 조금 짜증이 치미던 탓이었을까, 생각보다 말이 공격적으로 나갔다. 정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냥 전..붙잡아서 미안해요"
정이 하는 말을 듣는 척 만척 나는 얼른 뛰쳐나갔다. 그녀가 불안해 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녀는 손도 발도 얼굴도 있지만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내가 가지 않으면 언제나 벽을 보며 심심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녀가 무서워 할까봐 불을 키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내 방의 벽지만 관찰하게 할 뿐이다. 티비도 틀어났지만 그녀는 리모콘을 사용하는 법도 모른다. 원하는 채널고 마음대로 돌리지 못하고 내가 틀어놓은 채널만 그 지루한 광고마저도 보고 있어여 한다.
지루한 방송에서는 언제나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절망 밖에는 말하지 않는다.
예능마저도 항상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보고 싳어히지 않는 것도 그녀는 항상 봐야한다.
내가 가야만 한다.
벽지, 그녀는 지금 벽을 바라보고 있다. 하얀 벽지는 눈처럼 쌓이고 차가움은 고독처럼 방안을 메꾼다. 눈이 몸 위에 쌓이면 숨이 막힌다.
숨이 막히면 눈을 녹여야만 하는데 그럼 불을 질라야 한다. 라이터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담배를 피지 않는다 담배를 피면 방안에 연기가 가득해진다. 연기가 가득하면 싸이렌이 울리는데 니코틴은 벽지를 누렇게 만든다.
누런 사과는 먹을 수 앖다.
아름다운 황금색은 따뜻한 햇빛처럼 선반 위에 앉아 있다. 그 위 에는 짓눌린 어둠만이 가득하다. 시끄러운 소방차가 지나간다.
소방차는 붉은 색이다. 라이터가 반짝이고 노란 폭죽이 터진다.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은 황금색이다.
황금은 태양빛이다. 태양이 지구에 닿으면 모든 것이 녹는다. 녹으면 물이 가득해진다. 물이 녹으면 봄이 온다.
봄도 황금이다. 그것은 행복의 색이다. 우리는 낙원을 약속받았다. 낙원에는 그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클랙션 소리가 들렸다. 차가 바로 내 앞을 스쳐지나 갔다. 한뼘 차이였다. 나는 집 앞 건널목에서 신호를 건너다말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큰일 날뻔했네'
차에 치이면 더 이상 그녀를 보지 못한다. 내가 죽으면 그녀는 광고대신 나오는 이상한 홈쇼핑만 봐여했다. 그건 안될 일이다.
문을 열었을 때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었다.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Warum bist du so spät gekommen?'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아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뭐라하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가득한 음절만을 내뱉는다.그것은 내 귀에 조금도 머물지 않고 녹아 없어지는 소리였다.
"미안"
왜인지 모르겠지만, 사과해야 할 것만 같아서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그녀를 다른 곳에 옮기기 전 손을 씻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녀가 바닥에 떨어졌다.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면 그녀는 내가 처음에 놓아두았던 위치에 있던게 아니었다.
위치가 바꼈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바로, 누군가가 그녀에게 손을 댄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를 탐내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움직 일 수 없으니 내가 없으면 그 사람이 그녀를 가져갈 것이 뻔했다.
내가 그녀를 지켜야 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몇 없었다. 그 중 하나가 그녀를 하루종일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날 출근할때 그녀를 들고 나왔다.
모처럼 미세먼지도 없이 날이 좋았다. 하늘마저 그녀의 외출을 기뻐하는 것처럼.
*
"이게 뭐에요?"
환상부에 그녀를 내려놓자마자 정이 물었다. 이거,라는 물건을 지칭하는 말에 기분이 좀 나빴다.
"이거라니, 물건취급하지마"
최대한 화를 억누르며 나는 말하였다.
"아, 인격을 부여한거였어요? 미안해요, 그럼 이름도 지어준거에요?"
내가 인격을 부여한게 아니라, 그녀는 원래부터 독립된 생명체이다. 그렇기에 정의 말이 기분나빴지만, 이름을 묻자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아직 그녀의 이름 조차 몰랐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랐다.
"이름은 몰라, 그래도 예쁘지 않아?"
"어...그래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다가 이내 말았다. 그래 정마저도 그녀를 탐내서는 안됐다 멋대로 자랑한 내가 어리석었다.
오늘은 아무런 호출도 없었다. 모두 그녀가 있어준 덕분이었다.
점심에는 제육덮밥을 먹기로 해, 혹시라도 양념이 묻을까봐 그녀를 놓고가기로 했다.
사무실 문을 닫는 순간이었다. 와장창 하고 무언가 떨어진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 급히 문을 열었다.
그녀는 무사했다. 석하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땅에 떨어진 필기구들을 줍고 있었다.
"단씨?"
정이 불렀다.
내가 멍청했다. 그녀를 지키고다 했으면서 어떻게 또 나 혼자 나갈려고 했을까 내가 없는 사이에 누가 얼마든지 그녀에게 손댈 수 있었다. 지금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집어들었다.
"애착 인형같은거에요? 하루 종일 들고계시네요, 인형아니지만"
하며 정은 우스개소리를 던졌다. 단순히 인형 같은 게 아니란걸 알아봐주는구나, 그 사실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거 정말 촉감 좋나보네요 하루종일 만지작거리고"
"어 응, 그.. 푹신하고 따뜻해"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정은 눈썹을 찡그렀다. 내가 생각해도 좀 징그러운 말이었다.
"푹신하다구요? 그게?"
정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만져봐도 돼요?"
정이 손을 뻗았다.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안돼!"
하지만 정은 물러서지 않았다.
"홀린사람 처럼 왜 그래요?"
홀렸다? 나는 그게 나를 떠보는 말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정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환상부 사람이 그녀에게 손을 대는 순간 그녀의 안전은 보장 할 수 없었다.
"단씨"
정이 다시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를 안고 도망쳤다.
"단씨, 단씨!"
뒤에서 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곧 다른 사람도 나를 뒤쫓기 시작할 것이었다. 절대 저들에게 잡혀서는 안됐다.
택시를 타는 것조차 불안해서 나는 일부러 내 발로 뛰어다녔다.
한참을 뛰니 폐가 불타는 것 같았다. 운동화였지만 하루종일 달리니 발 전체가 점점 아파왔다.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이미 그들이 내 집을 점령하고 있을 터였다.
좀 숨울 고를려던 찰나, 길건너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힌지원, 환상부 사람이었다.
벌써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뒤 쫓고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 지원은 내가 건너편에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눈치채기 전에 나는 얼른 다른 골목으로 꺾었다.
정말로 해가 질때까지 거리를 돌아다녔다. 당연히 핸드폰의 전원은 끈지 오래였다. 다시 키는 순간 내 위치가 발각될 것이다.
나는 품에서 그녀를 꺼내 들었다.
"이제 어떡하지?"
'Nicht Sorgen'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를 안아줄 것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린채.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처음부터 이러면 됐었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나는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다시한번 허락받기 위해.
'gern'
그녀는 여전히 웃고있었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나는 그녀를 뒤집었다.
등 뒤의 봉제선 사이로 내 손울 집어넣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은 쉽게 찢겨졌다.
나는 그 틈을 벌리고 내 얼굴을 집어 넣었다. 부드러운 솜이 내 코와 입을 안정적으로 막았다. 숨을 쉴때마다,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산소조차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공기마저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리.
서서히 폐가 아파왔지만 그 아픔마저 감내할 수 있었다.
나는 마지막 숨을 들이 마셨다. 그녀의 안에서는 달큰한 사과향이 났다.